대한민국 헌법의 첫머리를 여는 제1조는 우리 헌법 전체의 이념과 원리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조항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두 문장은 우리 국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밝히는 등대이자, 모든 법률과 국가작용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입니다. 이 조항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나라의 법적 토대와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 및 책임의 근원을 파악하는 첫걸음입니다.
왕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헌법 제1조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수천 년간 이어진 군주(君主)의 시대를 끝내고, 국민(國民)이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피와 땀의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조선왕조까지 국가는 왕의 소유였으며 백성은 통치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나마 있던 주권마저 송두리째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암흑 속에서, 1919년 3.1 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 독립 의지와 함께 새로운 국가의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첫 헌장(현행 헌법의 모태)에서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군국(君國)'이 아닌 백성이 주인인 '민국(民國)'을 세우겠다는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현행 헌법 제1조는 바로 이 숭고한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이 국민주권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임을 확고히 못 박은 것입니다.
헌법 제1조의 두 기둥
헌법 제1조는 크게 국가의 정치체제를 규정한 제1항과 주권의 소재 및 권력의 정당성을 밝힌 제2항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심층적 의미
이 선언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두 가지 핵심 이념의 결합체입니다.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하여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화국' - 군주제를 거부하고 법치(法治)를 택하다
'공화국(Republic)'의 핵심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세습되거나 신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이는 곧 군주제와 모든 형태의 세습 독재를 명백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공화주의는 '공공의 것(res publica)'이라는 라틴어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사유물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권력은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어야 하며, 자의적인 통치가 아닌 '법의 지배(Rule of Law)' 에 따라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권력분립 원칙 또한 권력의 사유화를 막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공화국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장치입니다.
'민주' - 국가 운영의 방식과 목적을 규정하다
'민주(Democracy)'는 공화국의 운영 방식과 그 궁극적 목적을 규정합니다. 즉, 국민이 직접 또는 대표자를 통해 국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국민에 의한 지배), 그 통치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국민 전체의 이익과 기본권 보장에 기여해야 함(국민을 위한 지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세습 군주가 아닌 국민의 대표가,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공의 선을 위해, 자의가 아닌 법에 따라, 그리고 그 모든 과정과 결과는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 라고 종합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제2항 '주권은 국민에게, 권력은 국민으로부터'의 규범적 힘
제2항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조항으로, 국가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언합니다.
판례를 통해 본 국민주권: 신행정수도 이전 사건
이 조항의 강력한 규범적 힘은 신행정수도 이전 사건(헌재 2004. 10. 21. 2004헌마554) 에서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당시 정부는 법률을 제정하여 수도를 충청권으로 이전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은 비록 헌법 조문에는 없지만, 오랜 역사와 관행을 통해 형성된 국민적 합의로서 '관습헌법' 에 해당한다.
- 이러한 관습헌법을 바꾸는 것, 즉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이므로, 일반 법률로 할 수 없다.
-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만이 이러한 중대 사항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 방법은 헌법이 정한 공식적인 개정 절차, 즉 국민투표를 거치는 것이다.
이 판결은 헌법 제1조 제2항의 국민주권 원리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최고 규범임을 보여준 역사적 결정입니다. 이는 입법부(국회)가 만든 법률이라 할지라도, 국민주권이라는 최상위 원칙을 위반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주권의 주체 '국민'에 대한 이해 (학설)
그렇다면 주권의 주체인 '국민'은 누구일까요? 이에 대한 헌법학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구분 | 다수설 (통합설) | 소수설 (국가주권론 또는 민족주권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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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 주권의 주체인 '국민'을 현재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의 총합(peuple) 이라는 구체적 개념과,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추상적·역사적 공동체(nation) 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 국민을 개개인의 합이 아닌, 하나의 단일하고 유기적인 공동체인 '국가' 또는 '민족(nation)' 자체로 파악합니다. |
의의 | 국민의 직접적 참여(국민투표)와 간접적 참여(대의제)를 모두 조화롭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국민주권의 실질적 구현을 중시합니다. | 개별 국민은 주권을 분할해서 가질 수 없으며, 주권은 오직 대표기관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대의제 원리를 강조하는 데 치우칠 수 있습니다. |
현대 민주주의 헌법 해석에서 다수설인 통합설은 국민의 현실적인 주권 행사(선거)와 국가 공동체의 역사적 연속성을 모두 존중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권자로서의 시민, 그 책임과 과제
헌법 제1조는 우리에게 국가의 주인이라는 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요구합니다. 주권자로서의 권리는 투표일에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국가 권력의 행사를 감시하고,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토론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를 통해 실현됩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은, 역으로 말하면 모든 국가 권력은 언제나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헌법 제1조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은 정부나 정치인의 몫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있는 주권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고 그 책임을 다할 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그 이름에 걸맞게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